사진/뉴스토마토 "당신이 걸어간 길이 새로운 새벽을 밝힌다.(Tu ejemplo alumbra uno unevo amanecer)"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죽음을 맞은 바예그란데(Vallegrande) 지역 이게라(Higuera) 마을에 위치한 체의 흉상에 쓰인 글이다.

이처럼 체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을 달리 찾을 수 없다.

그는 20세기 중반에 삶을 마쳤지만 세계의 빈자들에게는 21세기의 빛을 선사했다.

지금 고전적 의미의 사회주의 혁명은 사라졌어도, 체의 로망은 세계 청년들의 가슴에 더 찬연히 빛나고 있다.

볼리비아는 '서부(Occidental)'와 '동부(Oriental)'라는 화해하기 어려운 두 지역으로 분리돼 있다.

10개의 주 중에서 6개 주로 된 서부는 안데스 고지대를 중심으로 인디오 마을과 광산지역, 그리고 우유니 소금사막과 티티카카 호수 등 관광지역이다.

이곳은 한국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4개의 주로 된 동부는 농업을 중심으로 한 저지대다.

사진/뉴스토마토 아르헨티노 의학도인 체는 대학시절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하며 볼리비아 서부의 대표적 광산 도시인 포도시(Potoci)에서 노동자의 처참한 실상을 목격하고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1967년 10월9일 동부의 이게라에서 최후를 맞았다.

라틴아메리카를 넘어 세계혁명을 꿈꾸었던 이 이방인은 볼리비아 서부 광산 도시에서 혁명의 씨앗을 품고, 동부 농촌 벽지에서 게릴라로서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일까. 2000년대에 들어서도 서쪽은 체에 대해 열광했지만 동쪽은 미온적이었다.

체는 20세기 혁명의 로망으로 자리 잡았지만 현지에서 만난 볼리비아노들은 그에 대한 감정이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근래 볼리비아에는 사회주의운동당 출신의 에보 모랄레스 정권이 들어서서 10년 이상이나 집권하고 체에 대해서도 추모행사를 하고 있지만, 그런 공식적 분위기와 달리 기층의 흐름은 이중적이다.

여전한 이방인의 모습이다.

체 게바라가 죽음을 맞이한 볼리비아 바예그란데 지역 이게라 마을 입구에 들어가면 만나는 체 게바라의 동상. 2m가 넘는 전신상으로 인근 몇개의 동상 중에서 가장 크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부유한 백인 지주들과 지식인들은 좌파 혁명가에 대해서 노골적인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내가 만났던 70대 노인들은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개인적인 식사자리에서 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서로 총구를 겨누고 싸웠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놀란 일은 많은 청년들도 그에 대해 호의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이었다.

왜냐고 물어보면, "그는 볼리비아노가 아닌 아르헨티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들은 에보 모랄레스식 사회주의 혁명에는 열광적이었지만 체에 대한 평가는 유보적이었다.

이 혼란스러움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2009년 산타 크루즈(Santa Cruz)에 정착하면서 체와 동시대를 보낸 게릴라들을 수소문했다.

지리산의 빨치산 생존자를 찾듯이 이곳에서 체와 함께했던 국제 파르티잔(Partizan)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체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싶었다.

의외로 게릴라 생존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초기 체가 활동했던 까미리(Camiri) 지역 사람들은 친척 중 한둘은 게릴라였다.

정작 만나보면 대부분 볼리비아 정부군의 퇴역군인들이었다.

스페인어로 '게라(Guerra)'가 전쟁이라는 뜻이니, 게릴라(Guerrila)는 혁명전사가 아니라 퇴역군인에 가까운 말이었다.

수소문 끝에 체를 직접 만났다는 현지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체의 마지막 모습을 본 민간인으로, 이게라 마을의 농민이었다.

그는 어느 날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총을 들고 산을 내려와서는 밥을 달라고 해서 먹고 떠났다고 말했다.

이 남자는 그 일 때문에 여러 차례 정부군과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산에서 내려와 황급히 밥을 먹고 떠난 그 일행 중에 체가 있었던 것이다.

이게라 마을에 있는 체 게바라의 흉상. 받침돌에는 스페인어로 '당신이 걸어간 길이 새로운 새벽을 밝힌다’는 글씨가 페인트로 쓰여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그 뒤로도 산타 크루즈에서 체 게바라와 만났던 생존자들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2년 넘도록 허사였다.

체는 이 지역에서 1년 남짓 있으면서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살길 원했지만 결국은 그 속에 섞이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볼리비아 산악을 떠돌다가 죽음을 맞았다.

볼리비아는 남미대륙의 한가운데로, 그 광활함과 험준함은 한국적인 감수성으로는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이다.

내륙국가인 볼리비아에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 생필품을 실은 트럭으로 칠레나 페루의 항구까지 나가는 데는 보통 일주일에서 열흘이 걸린다.

평균 고도가 해발 4000m나 되는 알티 플라노(Alti plano) 지역에서의 장대한 여정은 웅혼한 대자연의 파노라마다.

그 산맥에서 저지대 농업지대로 이어지는 바예그란데 산악지대에서 체는 중국의 마오쩌둥과 같은 농민혁명의 이상을 품고 헤맸다.

체는 20명이 채 되지 않는 쿠바혁명의 동지들과 볼리비아 저지대 시골을 헤매다가 사냥개에 쫓기는 사슴처럼 바예그란데 지역을 떠돌았다.

지금 볼리비아 정부는 체의 시신이 발견된 바예그란데에서 체를 사살한 이게라까지 차량으로 3시간 정도 소요되는 좁고 험준한 비포장 도로를 '체의 길(Ruta del Che)'로 지정했다.

지리산 산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 웅장한 길을 따라 마치 체를 순례하듯이 찾아가는 동안 1980년대 한국의 운동가사가 머릿속을 계속 맴돈다.

'내 맘 속에 영혼으로 살아 살아, 이 어둠을 사르리 사르리' 체의 삶과 민주화 운동의 열사들은 시대의 등불로 묘한 일치를 이루고 있다.

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이 민주주의의 빛을 밝혔다면, 체는 남미대륙에서 16세기 대항해시대 이래로 지속되어 온 글로벌 불평등과 빈곤에 대한 세계의 보편적 정의를 묻고 있었다.

그는 생애 마지막 불꽃을 남미의 이 산간벽지에서 불태웠다.

아르헨티나의 부잣집 아드님은 의대 재학 중 호기롭게 친구와 함께 칠레의 남단에서 대륙의 북단인 콜롬비아까지 오토바이 여행을 떠난다.

열정적이고 로망으로 가득한 라티노 청년다웠다.

여행길은 칠레에서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 그리고 콜롬비아까지 이어졌다.

길은 안데스 산맥의 가운데로, 평균 해발이 4000m에 이르는 끝도 없이 이어진 평원이다.

'높은 평원' 정도로 번역되는 그 유명한 안데스의 알티 플라노다.

현재의 지구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어느 때인가 평지가 융기해서는 해발 4000m에서 그대로 평균 고도를 유지하고 있다.

나무 한 그루조차 제대로 자랄 수 없는 고지대를 일주일씩 가로질러 달리는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하나의 경이에 가깝다.

체는 아르헨티나를 출발해 칠레를 지나 볼리비아 포토시 광산지역에 이르러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충격을 받는다.

꽃다발이 놓여 있는 표지석은 바예그란데에서 사살된 체 게바라의 시신이 발견된 곳이다.

체 게바라의 시신은 근처 묘지에 묻혔다가 현재는 쿠바 산타 클라라로 이장됐다.

체 게바라의 시신이 발견된 자리에는 지금 '체 게바라 기념관'이 들어섰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해발 4000m 광산에서 인디오들은 하루에 10시간씩 깊은 갱도에 들어가서 숨 막히는 채굴을 한다.

힘겨운 노동을 이기기 위해 코카나무 잎과 소다를 입에 넣고 마약성 가성효과에 기대 1년 내내 은과 주석, 아연의 원석을 파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착취는 1540년대에 포토시가 스페인 제국에 의해 개발된 이래로 지속되고 있었다.

은은 스페인으로 실려 나가고, 노동을 견디다 못한 인디오의 시신은 산야에 쌓여갔다.

아르헨티나의 부잣집 의학도는 이 부당한 모순을 바꿔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체가 생각한 혁명은 일국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문제의 원인은 1492년 지리상의 발견으로 대항해시대가 개막하면서 시작된 글로벌 불평등에 있었다.

체는 이를 개혁하려면 적어도 라틴 아메리카라도 단일전선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문제가 일개 국가를 넘어서면 해결방법도 글로벌 수준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의식은 한국의 청년들이 이해하기는 힘들다.

남미에서 국가간의 경계는 한국의 영·호남의 지역간 경계를 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혁명마저 치열하지 않다는 말이 있다.

군부정권이 쿠데타나 혁명으로 위기에 몰리면 결사적으로 반발하기보다 축재한 돈을 들고 이웃나라로 망명하는 것으로 결말을 끝내기 일쑤다.

이런 라틴적인 조건 속에서 체는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깨닫고, 젊은 시절에는 과테말라에서 의사로 일하며 결혼도 하고 사회주의에 깊이 빠져든다.

그 뒤 쿠바혁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농민혁명을 위해 볼리비아 동부로 소수의 혁명전사들과 함께 밀입국했다.

체 게바라의 사인. 체 게바라의 노트에 적여 있던 사인을 확대해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바예그란데의 '체 게바라 기념관'에 사진으로 걸려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나는 '체는 글로벌 빈곤과 불평등 그리고 20세기적 불의를 개별 국가 단위를 넘어 글로벌 수준에서 접근한 21세기형 혁명가였다'는 생각을 '체의 길'을 걷는 내내 굳혔다.

체는 20세기적인 농민들 속에서 21세기적 혁명을 설파했으니, 그들에게 공감받지 못하고 겉돌았다.

심지어 1960년대 일국주의가 지배한 소련과 중국, 그리고 혁명 동지 카스트로의 쿠바에서도 불편한 존재가 되어갔다.

글로벌 불평등을 향해 국제적 연대와 세계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체는 동시대에서 인정받기에는 너무 앞선 시대를 살았는지 모른다.

지금 밀레니얼스처럼 스마트폰을 들고 세계 각지에서 서로 연대와 협력을 모색하는 시대라면 체의 이상은 현실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국적 기업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21세기의 청년들에게 체는 로망이 된 것이 아닐까. 볼리비아 정부는 체의 시신이 발견된 바예그란데에 그의 묘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 체의 시신은 없다.

1990년대 카스트로가 쿠바의 산타 클라라로 시신을 모셔갔다.

나는 바예그란데를 방문할 때면 체의 기념관에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체로 한국의 80년대 민중가요를 적은 묘비를 세웠으면 하는 소망이 생겼다.

선생님은 돌아가셨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그런 날이 오길 기대한다.

'내 마음 속 영혼'과 '새로운 새벽'이 대륙을 넘어 청년들에게 공명을 울리지 않을까. 임채원 서울대 국가리더십센터 선임연구원 * 편집자 주: 필자 임채원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행정학 석·박사를 수료했다.

현재는 동대학 국가리더십센터 선임연구원 재직하며 세계화와 사회정책 등 글로벌 어젠다와 동아시아 국정운영을 연구하고 있다 '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는 필자가 2년간 볼리비아에서 체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항해시대 이래 지속된 세계화의 그늘에 관해 <뉴스토마토> 지면에 격주 금요일마다 총 11회로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