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최장수 KBO 기록위원 김재권씨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기초자료인 ‘사초’를 작성한 ‘사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대로 된 역사를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는 사관처럼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1982년 출범해 올해로 37년째를 맞는 프로야구에도 ‘사관’의 역할을 해온 이들이 있다.

기록위원들이다.

그중에서도 한국 프로야구 기록의 산증인이 있다.

바로 31년 동안이나 현장을 지킨 현역 최장수 김재권(58) 한국야구위원회(KBO) 기록위원이다.

지난 9일 서울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김 위원을 만나 프로야구 기록과 함께한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야구가 좋아 판 한 우물김 위원이 KBO에 입사한 것은 1986년 4월이다.

그해 2월 열린 기록강습회에 참가한 300명 가운데 특채된 3명 중 한 명이다.

그는 "한 명은 수습기간 중에 그만뒀고 다른 한 명은 10년 전에 퇴직해 혼자 남게 됐다"며 웃었다.

김 위원이 홀로 긴 시간 한 우물을 팔 수 있었던 것은 중학생 시절부터 야구에 빠졌기 때문이다.

김 위원을 야구광으로 이끈 것은 전파사와 헌책방이다.

그는 "중학교 때 동네 전파사에서 TV중계로 고교야구를 보면서 야구의 매력에 빠졌다"고 돌아봤다.

이후 부모님의 바람대로 실업계 고교 진학을 준비하면서도 야구부가 있는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를 골랐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주산과 부기 등은 그의 적성과 맞지 않았다.

김 위원은 "학업에 흥미가 떨어지니 2학년 때부터 동대문야구장에서 살았다.하루에 5경기씩 보기도 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야구에 빠져 살던 김 위원을 기록의 세계로 이끈 것은 청계천의 헌책방 골목이다.

우연히 야구기록에 관한 책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남들보다 먼저 야구기록에 눈을 뜨게 됐고 이것이 기록위원이 된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회상했다.

김 위원은 1년의 수습기간을 거쳐 1987년 4월 인천 도원야구장에서 열린 청보와 빙그레의 경기로 설레는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10년 만인 1997년 7월 1000경기를 채웠고, 2006년 5월에는 프로야구 기록위원 최초로 20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까지 김 위원은 1군 2632경기, 퓨처스(2군) 564경기 등 총 3192경기 기록을 직접 남겼다.

그는 이제 막내 기록위원과는 30살이나 차이가 난다.

많은 경기를 직접 기록했지만 그래도 유독 기억에 남는 경기가 없을 리 없다.

김 위원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경기는 1993년 삼성과 해태가 맞붙은 한국시리즈 3차전이다.

삼성 투수 박충식이 해태의 문희수, 선동열, 송유석 등 쟁쟁한 투수들과 홀로 맞붙어 15회 완투하면서 2-2 무승부로 막아낸 경기다.

김 위원은 "요즘 완봉·완투형 투수를 보기 힘든데 박충식의 역투가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했다.

김 위원이 언급한 두 번째 경기는 1997년 5월23일 한화-OB전이다.

당시 9회초 1사까지 퍼펙트 피칭을 선보이던 한화 투수 정민철이 심정수를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으로 1루에 내보내 퍼펙트 기록이 날아갔다.

김 위원은 "당시 포수 강인권이 공을 잡았다면 내가 역사적인 퍼펙트 경기의 기록원이 될 수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김 위원은 2군 경기였지만 2011년 롯데 이용훈이 퍼펙트를 완성하는 장면을 직접 기록하며 그 한을 풀었다.

아파도 안 됩니다"야구광으로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행운"이라고 말하는 김재권 위원은 기록위원이 되고 싶어 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김 위원은 "솔직히 선뜻 권하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그는 "일단 결원이 생겨야 충원이 되는 구조라 시기가 맞아떨어져야 한다.그리고 생각보다 박봉이다"라고 운을 뗐지만 그 밖에도 기록위원으로 적지 않은 고충과 애환이 있다고 털어놨다.

김 위원이 전하는 기록위원의 일상을 들어보면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KBO의 기록위원 총수는 17명이다.

이 중 위원장 1명을 빼고 매일 두 명씩 1군 5경기에 10명이 투입되고 나머지 6명은 2군 경기에 나선다.

즉 단 한 명도 1년 내내 쉴 수 없다.

김 위원은 "그나마 1997년에야 1군에 2명씩 투입됐다"면서 "시즌 중에는 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나도 31년간 딱 한 번 모친상 때만 빠졌다.빈자리는 기록위원장이 채운다"고 근무환경을 설명했다.

똑같은 일정의 반복도 힘든 일이다.

매일 경기 두 시간 전 야구장에 도착해 한 시간 전 나오는 출전선수 명단 확인부터 경기가 시작되면 쉴 틈이 없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20분 이상 기록을 확인하는 작업을 마쳐야 업무가 끝난다.

김 위원은 "그래도 2명씩 배정된 지금은 좋아진 것이다.1명씩 경기장에 나갈 때는 잠시도 현장을 떠날 수 없다.물을 갈아 마셔 배탈이 나도 화장실에 갈 수가 없을 때가 가장 힘들다.시쳇말로 휴지로 막고 경기를 봐야 한다"며 웃었다.

당연히 31년간 여름휴가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래도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그리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때문에 시즌이 중단되면서 뜻하지 않은 휴가를 받은 적도 있다.

김 위원은 "올해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때문에 휴가가 생겼다"고 반겼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31년의 세월은 프로야구 환경에도 많은 변화를 줬다.

인천 도원야구장을 비롯해 광주 무등야구장, 대구 시민야구장 등은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 위원은 "무등야구장은 기록원실이 1층 3루 쪽에 있어 포수와 심판에 가려 2루수 쪽이 잘 안 보였다.당시 평범한 땅볼 타구의 마지막 상황을 못 봤는데 주자가 살아 실책을 준 적이 있다.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불규칙 바운드였다.24시간 안에 기록 정정이 가능해 고민 끝에 고친 적도 있다"고 떠올렸다.

지금 대부분 구장의 기록실이 2층에 위치하고 2명이 함께 보기에 이런 실수는 나오기 어려워졌다.

야구장만 변한 것은 아니다.

기록도 2000년 이후 전산화 시대를 맞았다.

이제 2명의 기록위원이 한 명은 수기, 한 명은 전산입력을 담당한다.

이 기록은 포털사이트를 통해 팬에게 생중계된다.

김 위원은 "실수에 대한 부담도 덜었고 수기와의 대조작업을 통해 정확성도 늘어났다"고 평가했다.

또한 기록방식도 변했다.

1987년 자책점 지정 방식을 바꿨고 2002년에는 무관심 진루, 2005년에는 구원투수를 평가하는 홀드가 도입됐다.

2017년에는 한자로 이름을 쓰던 공식기록지를 한글화했다.

‘현실에 맞게 기록도 변해야 한다’는 게 김 위원의 생각이다.

하지만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판관’으로서의 야구 기록위원의 역할이다.

김 위원은 "다른 종목과 달리 야구기록원은 선수의 플레이 결과를 판정하는 권한이 있다.어떤 타구에 안타를 주느냐 실책을 주느냐에 따라 3할 타자가 2할로 타자가 될 수도 있다.투수는 노히트노런이 깨질 수도 있다.이것이 가장 큰 고충이자 언제나 고민하고 연구하는 문제다"라고 말했다.

김 위원은 또 "그래서 좋은 기록위원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록위원으로서 김재권 위원의 31년 삶이 보여준 것은 야구에 대한 애정과 성실함 그리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세다.

그는 자신의 기록강습회 접수증을 아직도 보관할 만큼 꼼꼼하다.

또한 바쁜 일상 속에서도 2013년 디지털 서울문화예술대학교 사회체육학과를 졸업한 만학도라는 점은 늘 연구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김 위원은 "무탈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복이다.야구를 사랑하고 볼수록 그 매력에 빠져드니 한 우물을 팔 수 있었다"며 최장수 기록위원이라는 명예를 가져다 준 공로를 자신이 사랑한 야구에 돌렸다.

송용준 기자 eidy01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