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우리곁을 떠난 별 또는] 지휘계 황제 카라얀, 동양무술 신드롬 일으킨 이소룡, 초대 대통령 이승만 ▲7월 16일 1989년, 모든 것을 장악하고자 한 지휘계의 카이저(황제) 폰 카라얀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년 4월 5일 ~ 1989년 7월 16일)은 토스카니, 푸르트뱅글러, 레너드 번스타인 등과 함께 20세기 최고 지휘자 중 한명으로 꼽힌다.

많은 평론가들이 카라얀에 대해 최고는 몰라도 두 번째라면 서럽다할 만큼 높이 치고 있다.

레코딩에 치중한 지휘자 중 한명으로 "레코드는 여러 번 듣는 것이다.여러 번 들어도 흠이 없어야한다"는 신조아래 치밀하고 긴장감 있는 연주를 강조했다.

그의 완벽주의에 따라 베를린 필은 세계최고 교향악단으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덤으로 독재자라는 악명도 얻었다.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클래식 음반사에 있어 불멸의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 7월 17일 1965년, 망명지 하와이에서 운명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한국 근현대사에서 이승만(1875년 3월 26일~1965년 7월 19일)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꾸려온 인물은 찾기 힘들다.

명문가 자손(세종대왕의 형 양녕대군의 16대 손), 한학공부, 독립운동, 조지워싱턴대 학사-하버드대 석사-프린스턴대 박사 등 완벽한 학벌,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대한민국 1~3대 대통령 등 그의 이력을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이승만은 자유당 정권 일부 지지자들이 꾸민 장기 집권책에 따라 실시된 1960년 3·15 부정선거로 4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성난 민심이 일으킨 4·19 혁명으로 대통령 자리를 내놓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1962년 3월 17일 귀국을 원했으나 당시 박정희 대장이 이끄는 혁명정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사망, 미 군용기편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족장을 거쳐 그해 7월 27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 7월 20일 1973년, 괴성에 노란 츄리링 유행시킨 이소룡 이소룡(1940년 11월 27일~1973년 7월 20일)은 동양무술, 특히 중국 쿵후의 아름다움과 빠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무술인이자 영화배우다.

당대 최고의 쿵후 고수 엽문으로부터 배운 영춘권을 응용, 절권도라는 특유의 무술을 만들어낸 이소룡은 브루스 리라는 이름을 허리우드 영화판에 충격을 던져 주었다.

1971년 당산대형을 시작으로 1972년 정무문, 맹룡과강, 이어 용쟁호투, 사망유희 등 5편의 작품을 전 세계 청소년의 우상으로 자리 잡았다.

고양이를 닮은듯 한 특유의 짧은 괴성인 "뽀요요", 아래위 일체형인 노란 유니폼(흔히 츄리링으로 불렀다), 이단봉 등은 대유행했고 거리 여기저기서 이단봉을 돌리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이소룡은 1973년 7월20일 일종의 돌연사를 했다.

그의 죽음을 놓고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복용한 약물 부작용, 진통제 과다복용설 등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칼을 들고 구름을 타던 다소 황당무계하던 홍콩영화가 이소룡 등장이후 무술을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로 변신했으며 1980~90년대 홍콩 느와르로 이어졌다.

서구인들은 이소룡을 통해 동양무술의 놀라움, 아름다움, 무서움을 한꺼번에 느꼈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