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스토리] 박정희 정권이 만든 희대의 간첩조작사건의 결말"새까만 안경에 이수근, 가짜머리 가짜수염 달고서, 홍콩가는 비행기에 탔다가 신나게 꼬리 잡혔네."어린이들은 남진의 히트곡 ‘마음이 고와야지’의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라는 가사를 이렇게 바꿔 신나게 불렀다.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패러디한 노래가 크게 유행할 정도로 이수근 간첩사건은 1960년대 후반을 강타한 사회적 이슈였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김태업 부장판사)는 11일 고(故) 이수근씨의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1969년 7월 3일 사형이 집행된 지 49년만에 내려진 재심 결정이다.

이로써 2008년 12월 29일 간첩혐의 재심 무죄에 이어 그를 짓눌러왔던 간첩관련 모든 혐의를 벗었다 .다만 이날 법원은 공문서 위조 및 행사,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 일부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1960년대판 서동요의 주인공이 될 만큼 유명했던 간첩사건 이수근 간첩사건은 1960년대 후반을 강타한 사회적 이슈였다.

오죽하면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이 사건을 패러디한 노래가 크게 유행했다.

어린이들은 남진의 히트곡 ‘마음이 고와야지’의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라는 가사를 "새까만 안경에 이수근, 가짜머리 가짜수염 달고서, 홍콩가는 비행기에 탔다가 신나게 꼬리 잡혔네"라고 바꿔 신나게 불렀다.

홍콩이 어딘지 알 길 없었지만 아이들 노래는 어른들 입에도 오르내렸으며 이수근은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간첩으로 내 몰렸다.

마치 백제 무왕이 아이들에게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 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레 안고 간다"라는 노래를 부르게 해 신라 왕실로 부터 부도덕하다면 내침을 당한 선화공주처럼. ◆영화 같았던 귀순, 대국민 환영대회1967년 3월 22일 당시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이었던 이수근은 판문점에서 열렸던 남북군사정전위원회 취재를 나왔다가 오후 5시쯤 회의장을 떠나려던 UN군 대표 밴 크러프트 장군 승용차에 잽싸게 올라탔다.

귀순을 눈치 챈 북한 경비병들은 40여 발을 쏘면서 저지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북한과 치열한 체제 선전전쟁을 펼쳐야 했던 박정희 정권은 출신성분이 뛰어난 북한 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의 귀순이라는 호재를 최대한 이용했다.

대국민 환영행사를 열었고 당대 스타 최은희씨가 ‘잘 오셨다’며 꽃다발을 목에 걸어 주기까지 했다.

중앙정보부는 대학교수와 결혼을 주선하는 등 초특급 대우속에 이수근을 반공교육의 살아 있는 교과서로 활용했다.

◆콧수염과 가발로 변장하고 위조여건으로 홍콩행 이수근 이름은 한국 탈출과 제3국에서의 체포 때문에 귀순 때보다 더 크게 사람들 입에 오르 내렸다.

1969년 1월 27일 가발과 가짜 수염으로 변장한 이수근은 위조여권을 들고 처조카 배경옥(당시 29세)과 ‘태국으로 간다’며 김포공항을 빠져 나갔다.

김포에서 도쿄, 타이베이를 경유하는 홍콩행 CPA기에 탑승한 이수근은 홍콩 험프리 호텔에서 이틀 머문 뒤 캄보디아로 행선지를 변경, 프놈펜행 CPA기를 타려고 1월 30일 홍콩 공항에 나타났다.

이수근 탈출 소식에 비상이 걸린 중앙정보부는 홍콩 전역을 뒤진 끝에 이들이 공항으로 향했다는 소식에 한국영사관 직원들을 동원해 강제 연행을 시도했다.

홍콩 공항에서 한바탕 소동이 빚어졌고 홍콩 경찰은 영사관 직원들과 이수근, 배씨를 연행했다.

영사관 직원들은 외교관 면책특권을 이용해 풀려났고 이수근은 '정치적 망명'을 주장, 1월 31일 캄보디아 프놈펜 출국을 허용받았다.

◆월남정권 협조아래 사이공 공항에서 체포 중앙정보부는 캄보디아행 비행기가 베트남 사이공(현 호치민)에 중간 기착한다는 사실에 따라 한국과 우호관계에 있던 월남정부의 협조를 받아내 총을 찬 요원들이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에 대기했다.

이수근과 조카를 태운 CPA기가 탄손누트 활주로에 내리자 중정 요원과 당시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 이대용 공사 등이 기내로 들어가 이수근과 조카를 체포, 군용기편으로 국내로 압송했다.

◆ 체포 3달 10일 뒤 사형선고, 선고 두달 뒤 형장의 이슬로 정부는 이수근을 북한을 위해 군사 기밀 등을 수집하는 등 간첩 행위, 북한과 접촉하려 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1969년 5월 10일 사형 선고, 7월 3일 사형집행까지 순식간에 진행됐다.

◆한국 생활에 혐오 느껴 탈출이후 이수근 간첩사건은 '조작'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이수근이 난수표나 탐지한 국가기밀을 소지하지 않았고 홍콩에서 북한 영사관으로 손쉽게 갈 수 있었지만 캄보디아로 향한 점 등을 그 근거로 제시됐다.

주변에선 숨소리 조차 중앙정보부가 감시할 만큼 자기 삶 자체가 전혀 없었다며 이수근이 느꼈던 압박감이 대단했음을 증언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중정 수사관들이 이수근 씨 등을 불법 체포·감금하고 수사과정에서 물고문과 전기 고문 등 가혹 행위를 했다"며 "사실 확인도 없이 졸속으로 재판이 끝났고, 위장 귀순이라 볼 근거도 없다"는 결과물을 내 놓았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