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할 때 잡수셔∼."지난 17일 오전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은 여느 평일과 마찬가지로 한가로웠다.

그러던 것이 점심시간이 지나자 공원 한쪽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장기판을 테이블에 고정해 놓은 이른바 ‘파고라 기원’에 어르신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 것. 장기알이 금세 동났다.

"한 판 두자"는 말도 없었다.

누군가 앉아 있으면 맞은편에 털썩 앉으면 그만이다.

"아이", "요거 봐라", "한우(장기말을 비유) 한번 잡숴 보셔." 장기를 두는 사람도, 구경하는 사람도 추임새가 제각각이다.

이기고 있을 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전라도와 평안도, 경상도와 충청도 사투리가 장기판 위에 뒤섞였다.

장기알 두는 ‘딱’ 소리가 사이사이 리듬을 맞췄다.

실제로 이곳은 공식적으로 ‘기원(棋院)’이다.

수십년 동안 장기 애호가들이 모여들다 보니 2016년 공원 측에서 아예 파고라(亭子)와 맞춤 테이블을 마련해 줬다.

있을 건 다 있다.

외부 바람을 막는 보온비닐과 LED전등도 설치해 겨울이나 야간에도 대국이 가능하다.

장기판은 18개뿐이지만 평일 50명은 기본이고 주말에는 100명도 넘게 몰린다.

한 달에 두 번씩 대회도 열린다.

"거, 훈수 좀 그만하쇼, 너무한 것 아니요."야외 장기의 꽃은 역시 ‘훈수’다.

원래 묘수는 남의 대국에선만 보이는 법이다.

"훈수만 두다 간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야외 기원’이 전국에 50여곳.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고 한다.

전국의 공원을 돌며 ‘도장깨기’를 하는 유튜버도 등장했다.

보라매공원 장기동호회 총무 오만성(64)씨는 "장기는 노인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요즘 젊은 사람들도 많다"며 "장기를 접할 통로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과거에 비해 입지가 많이 좁아졌다곤 하지만 장기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게임의 홍수 속에서 장기 특유의 ‘쉬우면서 오묘한’ 매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저력이 있는 만큼 ‘계기’만 생긴다면 얼마든지 ‘전국구’가 될 수 있다는 게 장기계의 시선이다.

자국 장기를 적극 지원하는 중국과 일본의 사례에 비춰 정부의 관심이 아쉽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삼국시대부터 즐기던 우리 장기19일 대한장기협회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 장기는 기원전 6세기 인도 장기 ‘차투랑가’가 중국을 통해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최남선은 ‘중국 송나라 때 고려로 전래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나 확실치는 않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장기는 아내를 빼앗는 수단으로 종종 등장한다.

삼국사기 열전 ‘도미(都彌)편’을 보면 백제의 4대 왕인 개루왕은 ‘도미라는 백성의 아내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미가 없을 때 부인을 찾아가 "도미와 내기 장기를 두어 이겼으므로 너를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고려사’에 나오는 고려가요 ‘예성강곡’에도 당나라 상인이 벽란도의 한 주막 여주인에 반해 그 남편과 내기 장기를 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부에서는 여기서 등장하는 내기 수단이 장기가 아닌 바둑이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고서에 등장하는 장기는 나무 목(木)자가 들어가 있는 ‘기(棋)’를 쓰고 바둑은 돌 석(石)자가 들어가 있는 ‘기(碁)’로 쓴 점에서 장기가 맞다는 의견이 대체적이다.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노사신은 장기를 하다가 ‘차(車)’만 잡히면 애걸복걸하며 물렸다고 해서 "‘노 정승의 차’처럼 불로장생했으면 좋겠다"는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야담이나 민요에서도 장기와 관련한 내용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외통수’나 ‘장군멍군’, ‘양수겸장’도 모두 장기용어에서 나온 말이다.

◆침체의 연속…"계기만 있으면"조선 말기 전국적으로 인기를 모은 장기는 일제강점기 일본식 바둑이 국내에 유입되고 큰 상금을 건 바둑대회가 잇따라 열리면서 조금씩 시들해졌다.

이후 국가적 관심을 이끌어내며 승승장구를 거듭한 바둑과 달리 장기는 침체기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2000년 공영방송 KBS가 프로기사 최고수를 가리는 ‘KBS 장기왕전’을 개최하면서 붐을 조성하는가 싶더니 2006년을 끝으로 폐지됐다.

이후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설날·추석특집으로 한 해 2번씩 대회가 열렸으나 시청률이 끝내 발목을 잡았다.

설상가상 지난해에는 장기프로기사 단체가 내홍 끝에 두 곳으로 쪼개졌다.

현재 대한장기협회 소속 프로기사가 103명, 대한장기연맹 소속이 142명이다.

두 단체 소속 프로기사의 교류가 불가능해지면서 수준 높은 대회가 나오기 어려워졌다는 우려가 깊다.

장기계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장기 룰이나 운영방식, 회장 선거 등에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장기의 대중화란 측면에서 분명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고 전했다.

이와 별개로 최근 장기는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평이 나온다.

스마트폰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면서다.

대국시간이 짧고 배우기 어렵지 않다는 점에서 스마트폰 시대에 ‘안성맞춤’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연계된 한 장기 앱은 성인만 가입이 가능한데도 가입자 수 172만명을 넘었다.

현재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최고 매출 8위에 랭크될 정도로 저력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와 올해 두 차례 여류기전에서 우승하고 프로기사가 된 송은미 초단(장기연맹)은 "장기는 신체나 공간의 제약이 없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마인드 스포츠’"며 "섬세하고 복잡한 수읽기에 성공했을 때는 ‘짜릿함’까지 맛볼 수 있다"고 말했다.

얼마 전부터 장기를 주제로 개인방송을 시작한 그는 "접할 통로가 드물어서 그렇지 일단 한 번 배우면 금세 빠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구독자 12만명의 장기 유튜버 박종준(25)씨는 "우리나라 장기도 충분히 재미가 있는데 젊은 세대에서 대중화가 잘 안 되는 것 같아 아쉽다"며 "큰 상금이 걸린 대회가 꾸준히 열리면 자연스레 관심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장기 붐’ 만든 일본과 중국가까운 일본에서도 장기 바람이 거세다.

일본 장기 ‘쇼기’는 한때 스모, 가라테와 함께 일본의 ‘국기(國技)’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1년에 쇼기를 한 번 이상 두는 사람이 1980년대 1600만명에 달했지만 2005년 840만명, 2016년 530만명 등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단번에 700만명으로 껑충 뛰었다.

사상 최연소 프로기사로 데뷔한 ‘천재 소년’ 후지이 소타(15)가 등장하면서다.

지난해 중학교 3학년이었던 후지이 7단은 프로 데뷔 29연승 신기록과 다승, 승률, 대국수, 연승 등 ‘4관왕’에 올랐다.

쇼기에서 4관왕이 나온 것은 1967년 이후 6번밖에 없다.

쇼기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쇼기 상품이 매진행렬을 이뤘고 쇼기 게임 앱들은 연승 기록이 경신된 6월을 기점으로 다운로드 횟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일본쇼기연맹 허성현 서울지부장은 "일본의 쇼기 대회는 상금 4200만엔(약 4억2000만원)의 용왕전을 비롯해 프로기전 14개와 여류기전 9개가 매년 열리고 있다"며 "일본도 우리처럼 프로 쇼기 인기가 식어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젊은 세대에서 꾸준히 스타를 배출하면서 재도약의 기회를 맞았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개최할 때 자국의 장기 ‘샹치’를 정식종목으로 채택하면서 붐이 일었다.

중국이 메달을 ‘싹쓸이’한 탓에 자취를 감추긴 했지만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정부 차원에서 장기를 국가대항전 종목으로 밀어붙일 정도로 입지가 단단하다는 방증이어서다.

대한장기협회 관계자는 "한·중·일 국가 중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장기가 찬밥신세인 것 같다"며 "방송국이나 대기업 등을 통해 국내에서도 대규모 장기대회가 열릴 수 있도록 물밑에서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