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유럽연합(EU)의 관계가 이상 기류에 빠진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지난 19일 브뤼셀에서 개최한 한·EU정상회담에서 공동성명이 채택되지 못하는 ‘이례적 사건’이 발생하면서다.

외교 관례상 통상 정상회담이 끝나면 양측은 공동성명이나 공동선언, 공동발표문 등의 형태로 회담 성과를 내놓고 양국 관계의 진전을 ‘과시’한다.

한국과 EU도 이번 정상회담의 공동성명 발표를 염두에 두고 집중적인 조율 작업을 벌였으며 공동성명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관심을 끌었다.

서울과 브뤼셀에선 이번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양측 간 논의된 내용을 총망라해 ‘수교 55주년을 계기로 양측 관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의지가 대단했다는 후문이다.

일례로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은 한·EU정상회담 하루 전날 브뤼셀을 방문해 EU 측과 불법어업 근절을 위한 공동선언문 서명식을 가졌고, 정상회담의 대표적 성과물 중 하나로 꼽혔다.

하지만 기대됐던 공동성명은 발표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놓고 각국 언론은 설왕설래를 내놓고 있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21일 자체 입수한 EU 측 공동성명 초안을 소개하며 한·EU정상회담에서 공동성명 채택이 무산된 것은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온도 차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초안에는 북한에 대해 ‘우리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계속 요구해 갈 것’이라는 표현과 함께 ‘압력과 제재 유지를 위해 힘쓰고, 모든 국가가 유엔 안보리 결의를 완전히 이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명시돼 있었다는 것. 또 신문은 EU 소식통을 인용해 한국 측이 최근 남북관계 및 북미 정상회담 등을 고려해 "비핵화를 위한 지금까지의 성과에 역점을 둔 성명으로 하고 싶다"고 했고, 결국 제재 유지를 강조하려는 EU 측과 절충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명백한 오보"라고 반박했다.

한·EU 정상회담에 앞서 개최된 한·프랑스, 한·이탈리아 정상회담 공동선언에서는 물론 아셈 정상회의 의장성명에서도 ‘북한에 CVID를 요구하고 비핵화 때까지 대북제재를 철저히 이행한다’는 내용이 명시됐음을 상기시키며 일본 언론의 보도를 부인했다.

그러면서 "CVID라는 표현 때문이 아니라, 이란 핵협정과 우크라이나 사태 부분에서 EU가 미국과 러시아 입장에 반하는 내용을 삽입하자고 강력히 주장해서 무산된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로서는 한반도 비핵화 협상 과정에 미국·러시아와 공조 체제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EU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국제사회와 이란이 합의한 이란 핵 협정에서 올해 5월 일방 탈퇴했고, 러시아는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 내분사태에 무력으로 개입하고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해 각각 EU와 마찰을 빚고 있다.

한국과 EU간 경제적 현안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정상회담 후 내놓은 EU 측 보도자료에 따르면 EU 측은 회담에서 발효 7년째인 한·EU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해 EU산 쇠고기에 대한 한국 시장 개방, 새로운 지리표시제 등을 포함한 지적재산권 관련 약속 이행, 노동 관련 약속 이행 등을 한국 측에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내용은 한국 정부의 브리핑에선 빠졌다.

특히 쇠고기 시장 개방 문제와 관련, EU는 그동안 ‘한국이 미국, 캐나다산 쇠고기 수입은 허용하면서 EU산 쇠고기 수입을 계속 불허하는 것은 과도한 조치’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제기해왔다.

한국 정부는 쇠고기 수입을 위한 정부 차원의 절차는 마무리됐고 국회에서 심의 중이라며 양해를 구해왔지만, EU는 수입개방을 늦추기 위한 ‘꼼수’로 받아들이는 상황이다.

중국이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 일부 EU 회원국 쇠고기 수입을 결정하면서 한국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반면 청와대 브리핑에선 EU의 철강제품 수입제한조치인 세이프가드 발동과 관련, 문 대통령이 한국산 철강제품의 적용 예외를 요구했다고 밝혔으나 EU 측 자료에선 소개되지 않았다.

EU의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가 이유라는 분석도 있다.

공동성명에 담길 내용에 대해 양측 간 충분한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란 관측이다.

EU의 의사결정 구조를 보면, 경제적 사안의 경우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에 많은 재량권이 있지만 외교적 사안에 대해선 집행위와 대외관계청(EEAS)이 대표로 나서 협의한 뒤에는 일일이 회원국 정부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또 한 가지 사안을 결정하려고 해도 28개 회원국의 실무자급-대사급-장관급 논의를 거쳐야 한다.

이뿐 아니라 회원국 가운데 한 나라가 협의 내용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 사실상 일종의 비토권을 행사하는 셈이 된다.

이를 설득하고 다시 협의를 재개하는 게 쉽지 않은 구조다.

대표적인 예가 EU와 캐나다간 FTA 격인 CEPA(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로, 지난 2016년 10월 최종 서명을 앞두고 벨기에의 왈로니아 지방정부의 반대로 진통을 겪은 바 있다.

이런 데다가 이번 한·EU 정상회담의 경우 아시아와 유럽 정상들이 참여하는 아셈 정상회의과 겹치면서 EU 측으로선 한국과 현안을 놓고 집중적인 조율을 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브뤼셀 외교가에서는 문 대통령이 이번에 EU를 공식 방문한 게 아니라 아셈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EU와 정상회담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공동성명을 채택해야 한다는 외교적 부담이 크지 않았던 점도 공동성명이 발표되지 않은 이유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실제 문 대통령은 프랑스, 이탈리아를 방문해 가진 정상회담에선 공동선언을 발표했으나 아셈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브뤼셀에서 가진 독일, 영국과 가진 정상회담에선 공동선언이나 공동성명을 내놓지 않았다.

한편, 이번 아셈 정상회의와 한·EU 정상회담에선 한국과 EU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여럿 있었다.

먼저 아셈 정상회의를 주재한 도날트 투스크 EU정상회의 상임의장이 첫날 개막식 갈라 만찬에서 문 대통령을 자신과 벨기에 필리페 국왕이 앉은 헤드테이블에 자리를 마련했다.

또 투스크 의장은 피아니스트 임동혁씨를 직접 뽑아 만찬에서 연주하게 함으로써 참석자들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배려했다는 후문이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아셈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최근 한반도 사태와 관련, "한반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전 세계에 새로운 희망을 불러온 문재인 대통령과 강경화 외교장관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하고 감사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EU 측은 한·EU 정상회의 보도자료에서 EU는 한반도 문제와 관련,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거론하며 한국 정부의 노력과 외교적 이니셔티브, 회담 결과물에 대한 이행을 지지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조현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