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흥인지문 방화범 “홧김에” / 조병갑 공덕비·삼전도비 페인트 / 그릇된 신념으로 역사청산 주장 / “네거티브 문화재는 역사적 교훈 / 보존·관리 국민인식 변화 필요”‘서울 삼전도비’(사적 101호)’, ‘서울 숭례문’(국보 1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 67호), ‘울주 언양읍성’(사적 153호), ‘서울 흥인지문’(보물 1호)….정부, 지방자치단체 등이 최고 수준으로 관리하는 국가지정문화재들이다.

각각의 막중한 가치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범죄의 대상이 되어 크고 작은 훼손을 입었다는 점이다.

주목할 것은 범죄자들이 문화재를 자신의 불만을 해소할 대상으로, 혹은 그릇된 신념에서 비롯된 역사 청산의 표적 등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지난 9일 발생한 흥인지문 방화에서도 이런 특징이 드러난다.

문화재청, 지방자치단체 등은 이런 형태의 문화재 훼손이 발생할 때마다 방재설비 확충, 관리 인력 보강 등의 대책을 내놓지만 예방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불만의 표시, 비뚤어진 역사 의식… 범죄의 표적이 된 문화재흥인지문에 불을 지른 장모씨는 나중에 말을 바꾸기는 했으나 검거 직후 진행된 경찰 조사에서 "교통사고 보험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억울했다.그래서 홧김에 불을 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흥인지문 방화로 표출된 측면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꼭 10년 전인 2008년 발생했던 숭례문 화재도 비슷한 범행 동기가 작동했다.

토지보상에 대한 범인 채모씨의 불만이 방화의 이유였다.

그는 2006년에도 같은 이유로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지른 전력이 있었다.

지난해 9월에는 박모씨가 언양읍성 성벽 4곳에 붉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낙서를 했는데 미국을 비하하는 내용, 욕설이 문구 중에 포함돼 있었다.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는 ‘투사’임을 자처한 문화재 훼손범들도 있다.

2007년 1월과 2월 백모씨는 ‘조병갑 공덕비’와 삼전도비에 페인트칠을 했다.

조병갑 공덕비는 동학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이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스스로 세운 것이고,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승리를 자랑하기 위해 지은 비석이다.

백씨는 문화재 훼손 이유에 대해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걸 경고하려 했다",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2006년에는 덕수궁 ‘분수대 물개상’을 이모씨가 망치로 내려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일제가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설치한 것"이라는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재판 과정에서 밝혔다.

해당 문화재들은 이른바 ‘네거티브 문화재’라 불리는 것으로 범인들의 말처럼 아프고, 치욕적인 역사를 증언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왜 보존, 관리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네거티브 문화재는 내부적으로 그런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되새기고, 외부적으로는 침략과 그에 따른 만행을 증언하는 가치를 가진다.

◆‘나의 불만을 알아달라’, 범행 효과 극대화 노리는 문화재 방화범이런 사람들이 문화재를 범행의 대상으로 노리는 것은 범행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욕망과 문화재에 대한 무지나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분석이 강하다.

자신이 가진 반감을 표시하기 위해 공공장소에 불을 지르는 이들이 종종 있다.

사회 또는 개인에 대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접근이 상대적으로 쉽고, 명소화된 문화재가 범행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인 셈이다.

경기대 이수정 교수(범죄심리학)는 "방화범들의 목적은 불만을 널리 알리는 것"이라며 "문화재처럼 주목도가 높은 대상에 불을 지르면 뉴스에 회자되는 등의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네거티브 문화재를 대상으로 한 범죄는 그것이 가지는 가치를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왜곡된 편견과 선입관이 강하게 작용해 벌어지는 일이다.

숭례문 화재처럼 이런 범죄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지만 범행의 동기와 대상 사이에 논리적인 인과관계가 분명치 않은 ‘묻지마 범죄’의 성격이 강해 예방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관리 당국의 고민이 깊다.

문화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런 형태의 범죄는 방재설비 확충, 관리 인력 확대 등의 방식으로도 대응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문화재 관리와 관련한 예방적 차원의 국민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